로얄석 애플파이
눈을 뜨니 11시였고, 급하게 준비한다고 했지만 늦은 시간에 출발을 하게 되었다. 간당간당하게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아 여러 방법을 생각해보다가, 차를 타고 천호역에 주차를 한 뒤 지하철을 타기로 결정했다. 좋은 결정과 잘한 결정은 원래 다르다. 결과를 알지 못한 채 처한 상황에 대한 합리적인 고려로 내리는 것이 좋은 결정이라면, 원하던 결과를 가져다 준 것이 잘한 결정인 셈이다. 그러니까 좋은 결정을 해도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얘기다.
서둘러 도착한 주차장은 거의 만차였고, 우리는 역 근처에 차를 댈 수가 없었다. 어떡하지 고민하다 B는 차를 끌고 가기고 결정을 하고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더 지체한다면 도착 시간을 늦출 것이기에 좋은 결정이었다. 예상 도착 시간은 1시 56분이었다. 잘하면 되겠다 하는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어서 가보기로 했다. 유턴을 할 수 없어 직진을 했고, 빨간불에서 서고 초록불에 달리며, 차가 많지 않은 도로에서는 빨리 달렸다. 순간의 모든 선택은 나쁜 결과의 가능성을 최대한 낮추는 방향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알고 있었다. 우리는 최선의 선택을 하면서 가고 있고, 결과가 좋지 않아도 후회할 거리가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빨갛게 막히는 도로 위를 달리던 중 갑자기 예상 도착 시간이 20분 늘어났다. 2시 14분 도착. 나는 공연 측에 전화를 했고 2시 15분이 넘으면 지연 입장도 어렵다는 답변을 받았다. B에게 그 얘기를 전달했다. B는 주차장에 도착하면 바로 공연장으로 갈 수 있는지 내게 물었다. 적어도 5분은 걸릴 거리라 나는 안 된다고 했다. B에게 다음에는 시간 변동이 적게 처음부터 대중교통을 타고 오자는 말도 했다. 그때 내 말투는 참 단호했다. 화난 사람처럼. 사실 나는 화가 나있었다. 누구의 잘못이라고 할 수 없는 상황으로 화가 나있다는 게 바보 같다고 생각했다. 눈을 감고 팔짱을 끼고 누웠다. 누가 봐도 기분이 좋지 않아보이게 있는 내 꼴이 별로였다. B는 조용했다. 그 적막을 곱씹다 내심 고마웠다. 원체 계획이 틀어지는 걸 싫어하는 B인데 내색하지 않으려고 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덕분에 나는 말이 없는 조용한 차 안에서 생각할 수 있었다.
화가 날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좋은 결정만 하며 여기까지 왔으니까. 화를 내도 안 된다. 왜나면 우리가 공연을 보려는 이유는 즐거운 시간을 만들고 싶어서였으니까. 우리가 함께 외출하는 목적은 단순히 무언가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걸 통해 같이 즐거워지려는 것이다. 그러니 공연을 보지 못했다고 해서 외출이 어땠는지 결정된 것은 아니다. 여기서 내가 B의 기분을 상하게 한다면 바로 그게 실패한 외출일 것이다. 이정도 생각하니 화는 온데간데 없었다. 차로 운전해 공연장에 가고 싶었던 B의 마음을 안다. B는 데이트를 할 때 대중교통을 타지 않고 싶어했다. 자신도, 상대도 편하게 가게끔 하고 싶어하니까. 생각이 다 정리 되었다. 나는 B의 손을 잡았다. B는 손가락을 움직여서 내 손을 쓸었다. 그런 작은 행동들이 나를 받아주고 있다는 느낌을 들게 해 좋았다. 나는 차를 돌려 백화점에 가자고 했다. 굳이 백화점을 고른 이유는 없었으나 어떤 곳에서든 정신을 환기하고 집에 같이 웃으며 들어가고 싶었다. 연극 예매한 비용은 지난 주에 로또 잔뜩 사서 다 낙첨된 셈 치자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별것도 아니었다. 카페를 갈까, 영화관을 갈까, 잠실 롯데월드몰을 갈까 고민하던 우리는 행선지를 정했다. 나와 같이 오늘을 잘 보내려 노력해주는 B에게 고마웠다.
백화점에 도착해 B는 내게 갖고 싶은 걸 찾아보라고 했다. 어제 내가 기념일 선물에 대해 말한 게 마음에 많이 걸린 모양이다. 서로 선물 취향이 다르다는 말이 새로 사달라는 뜻은 아니었는데. 어제 내가 또 모질게 말한 것 같아 미안했다. 준비를 거치지 않은 생각을 말할 땐 자꾸만 차갑게 말이 나온다. 그걸 고치려고 노력하는데도 B가 느끼기에 차가웠을 것 같아 미안했다. 나는 뭐든 좋았고, 크게 필요한 것이 없어 둘러보다가 지하로 내려가 먹고 싶던 디저트를 하나씩 샀다. 달달한 버터냄새가 한쪽에서 났다. B는 그 냄새에 홀린듯이 가서 여기서 나는 냄새가 맞나? 물었다. 거기에는 애플파이가 있었다. 우리는 애플파이를 종류별로 사고 다른 디저트도 몇 개 구매한 뒤 주차장으로 갔다. 기계식 주차장에 우리 차가 등록이 안 되어있어 애를 먹었다. 오늘은 운이 안 좋네. B가 말했다. 그 말이 좋았다. 누구의 탓도 하지 않고 그냥 오늘 운이 나빴다고 털어버리는 마음을 가지니 나쁜 일들이 새삼 또 별 거 아니었다.
오자마자 요거트를 만들어 디저트를 한상 차렸다. 오늘 외출의 결과가 식탁에 올랐다. 냉장고에 넣어둔 것들을 빼고 먼저 먹었다. 휘낭시에를 해치우고 봉투를 뜯어 애플파이를 꺼냈다. B가 한 입 먹었다. 우와 이 냄새였나 봐요. 버터 냄새의 주인을 찾았다. B가 크루아상을 좋아한다고 했는데 애플파이가 크루아상과 비슷했고 정말 맛있어서 우리는 서로 호들갑을 떨며 먹었다. 진짜 엄청 너무 맛있었다. B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는 게 좋았다. 오늘 외출의 결과는 애플파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로얄석에 상당하는 비싼 애플파이를 먹은 것이다. 잘한 일이었다.
B가 출근을 했다. B가 없는 집에 혼자 있을 때면 예전과 비슷한 느낌이 든다. 문득 모든 자극이 버거워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고, 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자체도 감당하기 힘들다. 무언가 하고 싶고, 하고 싶지 않다. 그런 무거운 정신 속에서 B를 생각해본다. 웃는 게 예쁜 B. 가장 초라한 모습으로 있으면서 이룬 것도 없는 지금의 나를 어떻게 저렇게까지 사랑할 수 있을까. 내 외형, 취향, 가치관을 보고 내게 빠진 것도 아니면서, 내게 동질감을 느낀 것도 아니면서, B는 나를 사랑한다. 나라는 사람을 좋아한다. 그런 사랑이 존재할 수 있는 걸까. 그러나 생각해보면 나라고 다른 방식으로 사랑에 빠진 것도 아니었다. B의 눈을 감상하고 있으면 거스를 수 없이 매료되는 기분이 든다. 그 투명하고 맑은 눈으로 원석 같이 순도 높은 감정들이 전해진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면 몸을 움직이고 일어날 힘이 생긴다. 일어나서 뭔가를 해야지. 뭐든 하기만 하면 B는 칭찬해준다. 손톱만 깎아도 말이다. 쉽게 모든 것이 멈추는 나를 B는 움직이게 한다. 내게 특별한 사람이다. 내가 멈추지 않고 B를 사랑할 수 있는 것도 결국 B의 덕분이다.